♡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 다산 정약용
유네스코는 2012년에 세계기념 인물로 네 사람 (루소, 헤르만헤세, 드뷔시, 정약용)을 선정하였는데, 그중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등재되었습니다.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집을 읽고 실학에 꿈을 키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선생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자기를 모함한 몇 사람에 대해서만 불편한 얘기를 조금 했을 뿐, 나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평생을 나라 걱정, 백성 걱정으로, 관료들의 부패를 척결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선생은 500여권에 달하는 저술을 통해 정치, 행정, 법학, 경제, 지리, 의학, 공학 등을 아우르며 철저한 실학사상(實學思想)을 펼친 실사구시 철학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초시는 1000명, 진사는 200명을 합격시켰는데 다산은 22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진사 합격자는 임금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조선왕조 최고의 대학자였던 정조는 다산의 주관식 논문을 읽고 인재로 키워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조와 처음 만남이 이루어지던 날 정조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이름이 무어냐?”
“네! 정약용입니다.”
“나이가 몇이냐?”
“22살입니다.”
“알았다.”
이 첫 만남을 다산 기록에 풍운지회(風雲之會), 즉 구름과 바람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조는 성균관 학생들에게 수시로 시험을 치렀는데 다산이 계속 장원을 하니 감탄하여 학생인 다산을 수시로 불러 국가정책에 대해 물어보았고, 다산이 올린 정책 여러 개가 국정에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6년 간의 성균관 공부를 마치고 2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첫날 시(詩)를 지었는데, 공직자로서 공렴(公廉)이란 두 글자를 마음 속에 다짐한 것이었습니다. 이 다짐은 평생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33세에 암행어사로 경기북부 4개 고을을 암행 감찰하였는데 농촌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생활과 관료들의 부패에 충격을 받고 이대로 두고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겠다 생각하며 결심하였습니다.
정조는 다산 선생이 30세 때 앞으로 10년을 계획하고 수원 화성 건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다산 선생은 설계를 하면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발명하였으며, 거중기 11대를 투입해 2년 4개월 만에 완공하였으니 정조가 감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다산의 유일한 배경이었던 정조가 서거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정권을 집권하면서, 선생은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 탄압에 연루되어 40세에 유배형을 받았던 것입니다.
1801년 11월 하순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정약전, 정약용 두 형제는 기약 없는 눈물의 생이별을 했습니다.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각각 유배를 떠났습니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동문 밖 주막에 들려 주모한테 어려운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높은 양반이 무슨 죄를 지었는 가는 모르겠는데 죄가 밉지, 사람이 밉겠소. 방이 하나 있는데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 내 부탁을 들어줄래요.”
“말씀 해 보세요.”
“당신은 암행어사까지 하신 분이라 배움이 많을 것인데 우리 동네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도 선생님이 없어서 배울 수가 없소. 공부를 가르쳐 주겠소?” “다른 건 몰라도 그거라면 하겠소.”
선생은 흔쾌히 허락하고 골방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정치한다고 책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마음껏 책도 보고 글도 써야 되겠구나, 하늘이 내게 내린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선생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천리 길을 가족과 헤어져 온 사람으로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암행어사 시절 관료들의 부패에 고통 받는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현실을 보았고, 유배지 강진 고을에서도 홍안애명(鴻雁哀鳴)의 슬픈 현실을 지켜 보았습니다.
선생은 목민관들의 마음 자세가 이런 상태라면 나라가 망할 것이며 개혁을 하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선생은 어리고 순한 양들이 제 목소리를 다 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리며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서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 16책, 억울한 백성들이 없도록 하는 형옥에 관한 법정서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10책,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저술한 경세유표(經世遺表) 필사본 44권 15책, 경세유표의 원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 “미완성작” 등등 500여권의 책을 저술하면서 모든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여 실행하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주자의 성리학적(性理學的) 해석과 관념의 문제점도 지적 실학적(實學的)으로 바꾸어 버리고 실천이 없는 철학과 사상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선생은 늘 “모든 과학의 원리는 수학에 근본이 있다.”고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과서를 개편하여 백성들이 수학을 배워야 나라가 부흥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식인 학연, 학유 두 자식이 잘못될까 걱정하며, 편지를 통해 수없이 효제(孝悌)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이 언젠가 폐족을 면하는 길은 책을 읽고 독서하는 것밖에 없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은 사람은 책을 읽을 줄 알고 짐승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가 벼슬을 했어도 재산이 없어 물려 줄 것이 없는데 야박하다고 서운해 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에게 유산으로 부적 두 글자를 물려줄테니 항상 지니고 다녀라. 그것은 바로 근검(勤儉)이다.”
올해 다산 정약용 선생의 탄신 260주년을 맞아 선생이 남기신 큰 유업과 위대한 실학정신을 되새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