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 우리 아버지의 술잔 / 국순정

내가 어렸을 땐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큰 산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을 알아 갈 때쯤 무서운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 알 수 없는 바람은 내 가슴까지 불어 눈물을 날리고 그저 의무감으로 무의미한 아버지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세상을 좀 더 알았을 때 세상은 내가 원하는 데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도 상처가 되고,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도 상처가 되는 것을,

아직 다 하지 못한 말 풀어버리지 못한 벽장 속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또 원하지 않는 상처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느 날, 당신이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일 때 나는 알았습니다.

그 흔한 김치 한 조각, 당신 술잔과 동행하지 않는 것을
그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인생이었을까요.

그 쓴 외로움이 그 술잔 속엔
버리지 못하는 빈 허풍만이 가득한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 허풍 속에 감춰진 아픔들이 눈물로 술잔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눈물을 묵묵히 삼키고 계셨던 것을,

내 아버지의 쓸쓸한 술잔 옆에 말없이 내 술잔을 놓아봅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좀 더 다정한 자식이 되어 드리지 못하고 웃음이 되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허풍의 힘으로
높은 파도를 막아주고 계셨고, 나는 그 고운 백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투정을 했던 것을,

아버지! 아버지의 술잔이
더는 쓸쓸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