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사는 한평생 살아오며 남의 가슴에 못 한번 박은 적이 없고 적선 쌓은 것을 펼쳐 놓으면 아마도 만경창파 같은 들판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선대로 부터 물려받은 그 많던 재산을 야금야금 팔아치워 겨우 제 식구들 굶기지 않을 정도의 중농 집안이 되었다.
정진사는 덕만 쌓은 것이 아니라, 학문이 깊고 붓을 잡고 휘갈기는 휘호는 천하 명필이었다. 고을 사또도 조정으로 보내는 서찰을 쓸때는 이방을 보낼 정도였다.
정진사네 사랑방엔 선비와 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부인과 혼기 찬 딸 둘은 허구한 날 밥상, 술상을 차려 사랑방에 들락날락 하는 것이 일과였다.
어느 날, 오랜만에 허법스님이 찾아왔다. 잊을만하면 정진사를 찾아와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누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허법스님을 정진사는 스승처럼 대했다.
그날도 사랑방엔 문사들이 가득 차 스님이 처마 끝 디딤돌에 앉아 기다리자 손님들이 눈치를 채고 우르르 몰려 나갔다.
허법스님과 정진사가 곡차 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정진사는 친구가 도대체 몇이나 되오?”
스님이 묻자, 정진사는 천장을 보고 한참 생각하더니 자랑스럽게 말했다.
“얼추 일흔은 넘을 것 같습니다.”
스님은 혀를 끌끌 찼다.
“진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오.”
정진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문을 활짝 열더니 말했다.
“스님, 한눈 가득 펼쳐진 저 들판을 모두 남의 손에 넘기고 친구 일흔을 샀습니다.”
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친구란 하나 아니면 둘, 많아야 셋, 그 이상이면 친구가 아닐세.”
두 사람은 밤새도록 곡차를 마시다가, 삼경이 지나 고꾸라졌다. 정진사가 눈을 떴을 때 스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날부터 정진사네 대문은 굳게 닫혔다. 집안에서는 심한 기침소리가 들리고 의원만 들락거려 글 친구들은 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열흘이 가고 보름이 가도 진사네 대문은 열릴 줄 몰랐다. 그러더니 때 아닌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밤에 곡 소리가 터졌다. 진사가 지독한 감기를 이기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한 것이다.
빈소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부인과 딸 둘이 상복을 입고 머리를 떨어뜨린 채 침통하게 빈소를 지켰다. 진사 생전에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글 친구들은 낯짝도 안 보였다.
그런데 한 친구가 문상을 와서 섧게섧게 곡을 하더니 진사 부인을 살짝 불러냈다.
“부인, 상중에 이런 말을 꺼내 송구스럽지만…”
그 친구는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미망인에게 건넸다.
봉투를 열어보니 차용증이었다. 정진사가 돈백냥을 빌리고 입동 전에 갚겠다는 내용으로 진사의 낙관까지 찍혀 있었다.
또 한 사람의 문상객은 왕희지 족자 값 삼백 냥을 못 받았다며 지불각서를 내밀었다. 구일장을 치르는데, 여드레째가 되니 이런저런 채권자들이 빈소를 가득 채웠다.
“내 돈을 떼먹고선 출상(出喪)도 못해!”
“이 사람이 빚도 안갚고 저승으로 줄행랑을 치면 어떡해…”
빈소에 죽치고 앉아 다그치는 글 친구들 면면은 모두 낯익었다.
그때 허법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빈소에 들어섰다. 미망인이 한 뭉치 쥐고 있는 빚 문서를 낚아챈 스님은 병풍을 향해 고함쳤다.
“정진사! 일어나서 문전옥답을 던지고 산 잘난 당신 글 친구들에게 빚이나 갚으시오.”
그 순간 병풍 뒤에서 ‘삐거덕’ 관 뚜껑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정진사가 걸어 나왔다. 빚쟁이 친구들은 혼비백산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도망쳤다.
정진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법스님은 빚 문서 뭉치를 들고 사또에게 찾아갔다.
이튿날부터 사또의 호출장을 받은 진사의 글 친구 빚쟁이들이 하나씩 벌벌떨면서 동헌 뜰에 섰다.
“민초시는 정진사에게 삼백 냥을 빌려 줬다지?”
사또의 물음에 꿇어앉아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린 민초시는 울다시피 읍소했다.
“나으리,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곤장 삼백대를 맞을 텐가 삼백냥을 부의금으로 정진사 빈소에 낼 건가?”
이렇게 하여 정진사는 글 친구들을 사느라 다 날린 재산을 그 친구들을 다 버리고 나서 다시 찾았다.
“친구란 온 세상 사람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 친구가 몇입니까?
친구란?
인생 팔십이면 가히 무심(無心)이로다.
저무는 해는 내 모습과 같고
부는 바람은 내 마음 같고
흐르는 물은 내 세월 같으니
어찌 늙어보지 않고 늙음을 말하는가?
육신이 팔십이면 무엇인들 성 하리오?
둥근 돌이 우연일리 없고 오랜 나무가 공연할리 없고 지는 낙엽이 온전할리 없으니 어찌 늙어 보지 않고 삶을 논하는가?
인생 팔십이면 가히 천심(千心)이로다.
세상 모질고 인생사 거칠어도
내 품안에 떠가는 구름들아,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탐 하리오.
한 평생 살면서 옳은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술 마실 때 형 동생하는 친구는 많아도, 급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친구는 한명도 없다고 했다.
내가 죽었을 때 술 한잔 따라주며 눈물을 흘려 줄 그런 친구가 과연 몇 명이 있을까?
살면서 외롭고 힘들 때 따뜻한 우정과 마음을 담아주는 친구가 내 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잠시 쉬었다 가는 인생, 어쩜 사랑하는 인연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노년의 친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