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이태원 유래

슬픈 이태원의 유래.

‘이태원’은 한자로 ‘梨泰院’이라 씁니다.

이태원의 이름은 한자만 3번 변했습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李’를 써서 ‘李泰院’ →임진왜란 이후에 ‘異胎院’ →효종 이후에는 ‘梨泰院’으로 글자와 의미가 변합니다.

원래 이태원은 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院)이었습니다. 서쪽의 홍제원. 동쪽의 보제원. 남쪽의 이태원과 인덕원은 서울 부근의 중요한 첫번째 원이었습니다.

이태원은 지금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태원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슬픈 이 땅의 역사가 떠오릅니다.

슬픈 역사하면 역시나 조선 시대의 ‘양대 칠푼이’ 선조와 인조가 등장합니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와 가토 기요마사 (가등청정) 부대는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남대문으로 유키나카부대는 동대문으로 입성합니다.

그 결과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고적 1.2호로 지정했습니다. 결국 이 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습니다. (이런 아픈역사가 있음에도 불 타버려 졸속 복구한 남대문을 국보 1호라고 전 세계에 자랑하는 나라 꼴이나, 한술 더 떠서 괘변으로 그를 합리화시키는 일부 학자 들을 보면 ㅠ.ㅠ)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을 합니다.

주둔중에 ‘가등청정과 부대’는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하는데, 대분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 주대상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소서행장과 불교신자이자 주전론자인 장수 출신의 가등청정은 일본에서부터 라이벌이었는데,

오히려 불교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살라 버립니다.( 가등청정 이 놈은 불국사도 불질러 버린 놈입니다.) 문제는 이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절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하여 이태원異胎圓(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합니다.

선조는 이에 이들과 그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곳이 이태원입니다
(출처 : 임하필기(林下筆記). 동국여지비고)

여기에 칠푼이 2호인 인조까지 가세하게 됩니다. 병자호란에 끌려갔던 여인과 그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결국은 이곳으로 흘러옵니다.

이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은 군사지역으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에 주둔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됩니다.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습니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겨났습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습니다.

한편으로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합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도 조성됐습니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연출합니다

기지촌 단속으로 퇴폐업소가 사라지면서 경리단길과 더블어 한국 속의 외국으로 변화하는 ‘이태원’

웬지 가까와지지 않는 이방인의 느낌이 드는 도심지 이태원 … 그 바탕에는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