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 나는 누구인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담을 소개합니다.

아주 먼 옛날 시골 사는 한 선비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갔습니다.

​과거시험을 치른 후에 한양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만물상에 들려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참 신기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는데 바로 손거울이었습니다.

​값이 비쌌지만 시골에서
고생하는 아내에게는 안성맞춤인 선물이 될 것 같아 사왔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를 찾았으나 일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비는 아내가 잘 볼 수 있도록 아내 눈높이의 벽에 못을 박고 거울을 걸어 놓았습니다.

​아내가 얼른 보고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선비가 외출한 사이에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이 메고 갔던 개나리 봇짐은 있는데, 남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방을 둘러보니 벽에 반짝거리는 것이 걸려 있었습니다.

​들여다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안에 젊고 예쁜 색시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한양에 과거보러 갔던 남편이 과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예쁜 색시를
데려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가슴이 떨렸습니다.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그동안 남편뒷바라지하느라 온갖 고생 다 했는데 남편은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색시를 데려왔으니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방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들어와
울고 있는 며느리의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어떤 색시를 데려왔나 싶어
거울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예쁜 색시는커녕
바싹 늙은 할멈이 있었습니다. 아니 이 녀석이
할망구하고 바람이 났다니!..
아들이 한심했습니다.

​첩을 데려오려면 젊고 예쁜 색시를 데려와야지 다 늙은 여자를 데려다 어디에 쓰려고?

​한심한 아들을 둔 시어머니가 속이 상해 퍼질러 앉아 웁니다.

​집안에서 통곡소리가 난다는 얘기를 듣고 들에 있던 시아버지가 헐레벌떡 들어 왔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시아버지가 확인도 할 겸
거울을 들여다 봤습니다.

​본 순간, 아버지가 넙죽 업드려 절을 합니다.

“아이고! 아버님, 왠일이십니까?”

​거울 속에 비친 늙은 자신의 모습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꼭 닮았던 모양입니다.

거울이 희귀하던 시대에 있었던 민담입니다.

​이런 헤프닝(happening)은 왜 생겼을까요?

​거울이 드물던 옛날에 자신의 모습, 외모를 본 적이 없어 모르기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그렇다면, 거울은 물론 사진, 동영상 등 문명이 발달한 현대에 사는 우리는 자신을
잘 알고 있을까요?

​아마 눈에 보이는 자기 외모는 잘 알겠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포함한 ‘나’까지도 잘 알고 있을까요?

그러지는 못합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한결같은 현상일 것입니다.

​장발장이 주인공인 소설 <레미제라블>을 통해서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인간이 치러야 할 싸움을 세 가지로 묘사합니다.

1)자연(自然)과의 싸움
2)인간(人間)끼리의 싸움
3)자신(自身)과의 싸움

이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라 했습니다.

​그 이유는자신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2,500년 전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경고한 이래 철학자들의 한결같은 견해인듯 합니다.

‘나”를 지칭하는 영어 일인칭 대명사의 주격 ‘I’와 목적격 ‘Me’는 동일한 ‘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I’는 내가 생각하는 ‘나’이지만, ‘Me’는
남이 생각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거울 민담에서 알 수 있듯이, 거울 속에 비친 ‘나’와 거울 밖에 존재하는 ‘나’도 반드시 동일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거울 속의 ‘나’는 내가 보는 ‘나’이지만, 거울 밖에 존재하는 ‘나’는 남이 보는 (생각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파헤칠수록 점점 혼란을 가중시키는 세상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존재가 ‘나'(自身)일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상대한 싸움은 구태여 손자병법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승산이 없는 싸움이겠지요.

이런 어려운 싸움을 숙명처럼 껴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네 인생은 고달픈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